후삼국 시대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견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 전투로 후백제는 쇠퇴하고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배경
안동과 합천 지역은 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요충지로써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이들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연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920년 견훤은 보마군 1만인으로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군사를 진례성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때 다급해진 신라 경명왕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안동 및 상주 지역에서의 전투는 연일 치열해지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고려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925년에는 견훤이 조물성을 공격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서로 대치만 하다가 결국 서로의 인질을 교환 후 화친을 맺고 잠시 전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927년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공산 동수 전투를 치뤘으며 이 전투에서 견훤은 고려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왕건은 목숨을 겨우 구했으나 당시 전투에서 8명의 장수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이후 왕건은 공산 전투 패배로 인해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되었는데 이 기회를 노리고 견훤은 930년 대군을 이끌고 고창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하게 되고 왕건은 후백제의 기세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고창을 포기할 것을 고민하였지만 유금필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창을 사수하기 위해 진군하기로 한다.
고창 전투 전개
후백제의 견훤이 이끄는 대군을 맞이할 고창에는 고려군이 겨우 3000명이 주두하고 있었으며 견훤은 신라의 호족 지원군과 함께 고창을 포위하게 되는데 고창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왕건과 대치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가 3~4일간 지속되었으나 초기에는 후백제가 우세하였으나 견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고청 신라 호족들이 고려군의 편을 들었고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식량과 물자 보급을 공격하는 전술을 보여주면서 전세는 고려군의 우세로 돌아섰다.
견훤에게 반기를 든 김행, 김선평, 장정필 3명의 호족들은 후에 고려의 공신으로 인정받게 된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백제군의 전사자는 8000명에 달했고 견훤은 목숨만을 겨우 부지한 채 후퇴하게 되면서 후백제가 항복하게 된다.
결과 및 영향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는 전사자만 8,000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입게되면서 주력 병력이 궤멸당하고 기세까지 확 꺾여 주도권을 잃은 뒤 고려의 공세에 점차 밀리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후삼국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으며 상주는 고려에게 다시 넘어갔고 신라와 양주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했으며 웅주와 강주 역시 고려군의 맹공에 밀려서 위태위태해지고 재탈환했던 나주도 유금필의 기습 공격을 당한다. 그나마 회심의 작전이었던 수군을 이용한 송악 공격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엎질러진 판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끝내 후백제는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이전의 기세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후계자 문제까지 겹치며 결국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기세를 몰아 경상도 일대 거의 모든 영토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기존 영토를 동남부까지 확장하였다. 이후 후백제의 영향력이 없어진 신라는 고려에 갇혀 수도 서라벌과 인근 동해안 영토만 지배하게 되고 국가는 매우 초라한 수준으로 전략하게 된다.
결국 고려는 이 전투로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후에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