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 발전
전제 왕권의 강화
- 태종 무열왕 :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이후 무열왕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나·당 연합을 결성하고 백제를 정벌하였으며 통일 전쟁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 문무왕 : 고구려를 정벌하고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676년)
- 신문왕 :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으며 중앙 정치 기구로 집사부 등 14부와 지방 행정 조직인 9주 5소경을 추진하고 군사 조직은 9서당 10정으로 정비하였다.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이로 인해 진골귀족의 경제 기반은 약해져 갔다.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치하고 6두품을 중용하였으며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건립하였다.
통치 제제의 정비
- 중앙 : 집사부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고 화백 회의의 기능을 축소함으로써 상대등의 권한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 지방 : 행정적 기능을 강화(9주)하고 군사, 행정상 중요한 곳에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진 점을 보완하였다.
- 군사 제도 : 9서당(중앙군)은 고구려, 백제, 말갈인까지 포함시켜 민족 융합을 도모하였으며 10정(지방군)은 9주에 1개의 정을 배치하고 국경 지대인 한주에는 2개의 정을 배치하였다.
- 토지 제도 :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신문왕)하고 선덕왕 때 정전을 지급하고 경덕왕 때 녹읍을 부활시켰다.
전제 왕권의 동요
- 무열왕계의 권력이 독접을 하자 이에 반발하고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이 지속되며 김헌창의 난 및 장보고의 난 등 지방 세력의 반란이 심해졌다. 상대등의 권한이 강화되고 시중의 권한은 약화되어 왕권이 강화되었다.
- 스스로를 성주, 장군이라 칭하는 새로운 호족 세력이 등장하여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6두품은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호적 세력과 연계하고 반신라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 진성 여왕 시기에는 원종과 애노의 난 등 농민 봉기가 절정을 이루었고 선종, 풍수지리설 등은 호족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후삼국의 성립
- 후백제는 견훤이 완산주를 도웁으로 하여 건국하고 전라도의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중국과 외교하고 신라의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죽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 후고구려는 궁예가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하고 국호를 마진으로 정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정비하는 등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설치하였다. 미륵 시앙을 이용한 궁예의 폭정으로 신하들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이후 고려가 건국되었다.
발해의 발전
발해의 건국과 발전
-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지린성 동모산에서 698년 건국되었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고려 국왕' 호칭을 사용하고 지배층에 고구려인이 다수 포함되며 온돌, 이불병좌상, 돌사자상 등을 통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 발해의 무왕은 대문예에게 흑수 말갈 공격을 지시하고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 지방 등주를 공격하엿고 일본, 돌궐과 교류하며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 발해의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형성하고 당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였다.
- 발해의 선왕은 요동에 진출하고 지방 행정 체계 확립하고 '건흥'이라 연호를 사용하고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전성기를 누리고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발해의 통치 쳬계
발해의 중앙 행정은 당의 3성 6부를 수용하고 운영과 명칭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고 감찰 기구로 중정을 두었다.
지방행정은 5경 15부 62주이고 중앙군은 10위(왕궁과 수도 경비)로 각지에 배치하고 지방관이 지휘하였다.